종강 후 삶의 여유를 되찾았다. 본디 대학생의 스탠스란 적당히 놀고 먹다 바쁠 때쯤 가볍게 투정해주면 되는 것이라 늘 여겨왔지만.. 그렇다 하여 마냥 삶에 틈이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레퍼런스를 따와 작업물을 만들고, 손을 타는 예민한 사물들을 덧대어 나갔다. 이상과 달리 모든 게 흡족하진 않았다. 난 못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분명 눈은 미끈한 미감을 원하는데, 손을 따른 것들은 투박하기 그지 없었으니 아무래도.
사실은 늘 가만한 하루들에 싫증이 나 있었는 지도 모른다. 감각과 자아가 정체되어 있다고 느낄 즈음이었다. 스크롤 한번이면 피드가 바뀌는 핀터레스트 화면 마냥, 늘 새로운 것들이 곤두섬에 압박을 느꼈다. 어쩐지 잘 정리된 ui 속 이미지 사이에서 맥없이 한참을 머물렀던 것도 사실은 그 이유다.
그러나 미감은 그저 부유하는 이미지를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대체 불가한 미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과제를 하며 느꼈던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재생산은 지속적인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자아가 멋이 되고, 그 자아를 시각화한 이미지가 대중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 상품성은 딸려오는 것이 된다. 자아의 확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천을 뜯어내는 여자. (”공간은 피막,피부” 공식 포스터)
과거부터 자신의 자아에 귀를 기울여 온 이들은 늘 예술에 자문을 구해왔다. 또한 그들이 남긴 고뇌의 흔적은 후대 사람들에게는 다시 질문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나는 이들의 궤적을 밟으며 대체 불가능한 자아와 미감에 대해 탐색하고자 한다. 그들의 작업들은 어떠한 일관성의 미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런 일관성은 단순히 자가 복제가 아닌 끊임없는 질문으로 축적된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스위스 작가 하이디 부허의 작품 세계 역시 이러한 영혼의 단단함을 접했을 때의 감동을 주었다. 1993년 작고한 그녀는 생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예술가였다. 현재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 "공간은 피막, 피부"(2023.3.28~2023.06.25)는 그녀의 방대한 작업을 소개하는 회고전이다. 전시를 통해 볼 수 있었던 그녀의 미적 일관성은 그 자신만의 세계를 가늠케 했다.
그녀의 미적 세계를 개연성있게 보여주는 데 크게 한 몫 한 것은 전시 공간 구성이었다. 하이디 부허라는 낯선 스위스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 내고, 그녀의 내러티브에 집중하게 만드는 동선의 기획이 돋보였다.
전시관에 들어오자마자 관객은 사전정보 없이 어떠한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저화질의 영상 속에는 작은 체구의 여자가 벽에 붙은 거대한 천을 온 힘을 다해 걷어내고 있다. 영상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객은 고개를 돌려 거대한 설치물을 발견한다. 영상과 설치물 간의 관계를 고민하던 관객은 마침내 그 설치물이 바로 영상 속 여자가 뜯어내던 천이며, 그녀가 하이디 부허라는 것을 유추하게 된다.
마치 폐가의 흔적같은 이 거대한 설치 작품의 이름은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1988)로, 과거 스위스 정신의학자 빈스방거가 운영하던 벨뷰 요양원의 일부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 진찰실 벽에 접착제를 바른 거즈 천을 덮고, 액상 라텍스를 바르고 벗겨내 만든 이 작품은 당시의 공간을 새로운 소재로 박제한 것이다.
작품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의 질감.
작품을 통해 부허는 공간에 시대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 현재는 대표적인 선진국인 스위스는 과거 한국보다도 늦은 1971년에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을 만큼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다. 당시 ‘여성들만 걸리는 정신병’이라는 편견이 만든 병명 '히스테리아'로 인해 여성 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요양원에 보내지곤 했다. 부허가 작품으로 전시한 진찰실은 이 요양원의 최고 권위자 남성인 빈스방거 박사의 것으로, 그 자체로 시대의 가부장성을 투영하고 있는 공간이다. 관객은 이 공간 속에 직접 들어가 다각도로 공간을 바라보고, 과거 진찰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권위적인 공간을 뜯어내는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1전시실은 전통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이 대립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에서는 가부장성이 드러난 공간이 드러났다면, 이와 대치되어 전형적인 '여성성'이 드러나는 사물들도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다. 위의 두 작품을 비롯하여 그녀는 스타킹, 앞치마처럼 여성들과 관련된 사물을 굳혔다. 그 위에 반짝이는 자개 안료를 발라 과거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유약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빈스방거 박사의 진찰실>의 뒤편을 둘러싸며 전시장 내부에서 서로 대치되는 공간적 긴장을 만든다.
2전시실은 1전시실과는 사뭇 다른 모티브로 구성되어 있다. 비현실, 초월같이 조금 더 고조된 주제가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먼저 1전시실에서는 성적 전형성, 권위를 그 자체로 박제하는 형식으로 관람객에게 여러 감상을 일으켰다. 이는 하이디 부허가 현실에 천착하여 만들어낸 그녀만의 시대상 반영물이다. (부허의 활동 시기는 1900년대 중후반으로, 여전히 성차별이 극심했기에 그녀에게 차별이란 그저 현실이었다.)
2전시실에서는 현실을 옷벗듯 탈피하고, 비현실을 구축하고자 했던 그녀의 시도들을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전시실 내부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것은 마치 곤충 허물처럼 보이는 <잠자리의 욕망>(1976) 이다. 이 거대한 작품 <잠자리의 욕망>(1976) 은 모든 전통과 가부장성, 억압으로부터 탈피한 후 남은 허물만을 보여주고 있다.
<잠자리의 욕망>(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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